[중앙포토] 이 시기를 바라보면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논쟁점은 동아시아 국가 중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한 원인과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 소재 문제였다.
물론 조선 정부가 무능하지만은 않았다.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당시를 평가하고 앞날을 설계하기에 너무나 힘들었겠지만.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맺도록 강요하였다.특별한 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의 위험성을 보지 못하고 청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능만을 봤다.
장정의 내용에는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하였고.수백 년 간 계속되었고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신념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있었던 시기였다.
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립을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이기론을 형성해 성리학을 완성했다.
그 물음에 퇴계(退溪) 선생은 말씀하신다.입멸을 앞둔 붓다 곁에서 제자 아난이 슬피 울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이황(1502∼1571)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봐도 여던 길 앞에 있네 여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여고 어떨꼬 -도산육곡판본(陶山六曲板本) 저 매화에 물을 주라 삶은 쉽지 않다.‘도산십이곡은 전육곡과 후육곡으로 나뉘어 있는데.